제니스 데이토나, 빌린 무브먼트가 롤렉스의 역사가 된 순간
[이미지 출처 : 롤렉스 공식 홈페이지]
오늘날 롤렉스는 무브먼트를 비롯한 핵심 기술을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브랜드로 인식됩니다.
그래서 롤렉스 데이토나 Ref. 16520은 지금 보면 조금 낯선 존재입니다. 롤렉스의 대표적인 크로노그래프 안에 제니스의 자동 크로노그래프 엘 프리메로(El Primero)를 기반으로 만든 칼리버가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 모델은 롤렉스 최초의 자동 데이토나이자, 지금도 흔히 '제니스 데이토나'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이 이름만 들으면 롤렉스가 제니스의 무브먼트를 그대로 가져와 사용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실제 이야기는 조금 다릅니다.
저는 이 시계의 재미가 단순히 두 유명 브랜드의 이름이 한 시계 안에서 만났다는 데 있지 않다고 봅니다.
사라질 뻔한 하나의 무브먼트와 자동 데이토나가 필요했던 롤렉스의 선택이 우연히 같은 시점에서 만났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물이 어느 한 브랜드의 시계라고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려울만큼 크게 바뀌었다는 점이 더 흥미롭습니다.
[이미지 출처 : 롤렉스 공식 홈페이지]
데이토나에도 자동 무브먼트가 필요해졌다.
데이토나는 1963년 모터스포츠와 연결된 크로노그래프로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데이토나와 달리 당시에는 수동 와인딩 방식이었습니다. 롤렉스 역시 Valijoux 72 계열을 기반으로 수정한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사용했고, 직접 크라운을 돌려 태엽을 감아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1969년을 전후해 자동 크로노그래프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제니스 역시 같은 해 36,000회/시간, 5hz로 작동하는 자동 고진동 크로노그래프 엘 프리메로를 발표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 롤렉스가 데이토나를 자동화하려 했을 때,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자체 자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는 없었습니다. 결국 롤렉스는 이미 검증된 자동 크로노그래프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기준에 맞게 다시 만드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 기반이 엘 프리메로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 제니스 공식 홈페이지]
그런데 엘 프리메로는 사라질 뻔했다
흥미로운 것은 롤렉스가 엘 프리메로에 관심을 보이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무브먼트가 계속 생산될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했다는 점입니다. 쿼츠 파동이 스위스 시계 산업을 흔들던 1975년, 제니스는 엘 프리메로 생산 중단을 결정했습니다. 이때 제니스의 워치메이커 샤를 베르모(Charles Vermot)가 회사 방침을 거슬러 행동합니다. 엘 프리메로를 다시 생산하는 데 필요한 프레스와 캠, 절삭 공구, 기술 도면 등을 모아 제니스 르로클 매뉴팩처의 다락에 보관한 것입니다. 제니스는 그가 당시에는 그 행동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만들지 아무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기계식 크로노그래프에 대한 수요가 다시 생겼습니다. Ebel이 엘 프리메로에 관심을 보였고, 뒤이어 Rolex가 대량 공급을 원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니스 공식 기록에 따르면 Rolex와는 10년 계약이 체결됐고, 첫 무브먼트가 1988년 공급되면서 같은 해 엘 프리메로 기반의 Daytona가 등장했습니다.
샤를 베르모가 보존했던 것은 오래된 공구 몇 개가 아니었습니다. 10년 뒤 다시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남겨둔 셈입니다.
[이미지 출처 : 롤렉스 공식 홈페이지]
엘 프리메로를 넣었지만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제니스 데이토나가 재미있어집니다. 롤렉스는 엘 프리메로를 받아 그대로 케이스 안에 넣지 않앗습니다. 5Hz, 시간당 36,000회였던 진동수를 4Hz, 28,800회로 낮췄고 날짜 기능을 제거했습니다. 여기에 밸런스와 헤어스프링, 이스케이프먼트뿐 아니라 자동 와인딩 시스템 등 여러 부분을 롤렉스 방식으로 다시 설계했습니다. 롤렉스 공식 기록은 원형 무브먼트의 50%가 넘는 부품을 자체 사양 부품으로 교체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완성된 것이 칼리버 4030입니다.
그래서 '제니스의 심장을 품은 롤렉스'라는 표현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출발점은 분명 엘 프리메로였지만, 완성된 무브먼트의 성격은 상당 부분 롤렉스 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롤렉스는 칼리버 4030을 설명하면서 엘 프리메로라는 이름보다 신뢰성과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기존의 우수한 메커니즘을 대폭 수정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제니스가 구조를 제공했고, 롤렉스가 그 구조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다시 해석한 무브먼트. 칼리버 4030은 그렇게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1988년, 데이토나의 성격도 바뀌었다.
1988년 등장한 스틸 Ref. 16520은 단순히 기존 데이토나에 자동 무브먼트만 넣은 모델도 아니었습니다. 케이스는 약 40mm로 커졌고 사파이어 크리스털이 적용됐으며, 전체적인 디자인 역시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현대 데이토나의 형태에 가까워졌습니다. 무엇보다 자동 와인딩을 적용하면서 데이토나는 매일 사용할 수 있는 스포츠 크로노그래프로서 한 단계 더 편리해졌습니다. Ref. 16520과 칼리버 4030은 1988년부터 2000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이후 롤렉스는 자체 개발한 칼리버 4130과 함께 Ref. 116520을 내놓으며 제니스 기반 무브먼트 시대를 끝냅니다. 결과적으로 Ref. 16520은 두시대 사이에 놓인 시계가 됐습니다. 수동 데이토나에서 자동 데이토나로 넘어가는 시작점이면서, 완전한 인하우스 데이토나가 등장하기 직전의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제니스 데이토나가 특별한 진짜 이유
제니스 데이토나의 가치를 단순히 '외부 무브먼트를 사용한 희귀한 롤렉스'에서 찾으면 이 시계의 이야기가 조금 작아집니다. 한쪽에서는 쿼츠 시대에 사라질 뻔한 기계식 크로노그래프를 한 명의 워치메이커가 지켜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자동 데이토나를 만들기 위해 이미 검증된 구조를 선택했고, 그 구조의 절반 이상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다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선택이 198년 Ref. 16520에서 만났습니다.
제게 이 시계가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완전히 제니스 무브먼트라고 하기에도 어렵고, 처음부터 롤렉스가 만든 무브먼트라고 하기에도 어렵습니다. 다른 브랜드의 기술을 빌렸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얼마나 롤렉스다운 방식으로 바꿧는지가 더 중요한 시계입니다. 동시에 샤를 베르모가 다락에 남겨둔 공구와 도면이 없었다면 그 출발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니스 데이토나'라는 별명은 단순히 무브먼트 공급사를 뜻하는 이름 이상으로 느껴집니다.
한 브랜드가 지켜낸 기술이 다른 브랜드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낸 순간을 기억하게 하는 이름에 더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