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전문가 컬럼

시계는 왜 아직도 보석을 무브먼트 안에 넣을까?

시계는 왜 아직도 보석을 무브먼트 안에 넣을까?

[이미지 출처 : 롤렉스 공식 홈페이지]

기계식 시계의 스펙을 보다보면 조금 낯선 숫자가 등장합니다.

17 Jewels, 21 Jewels, 31 Jewels.

말 그대로 무브먼트 안에 들어간 주얼(Jewel)의 개수입니다.

실제로 시스루 케이스백을 통해 무브먼트를 들여다보면 금속 부품 사이사이에 붉은색 보석처럼 보이는 작은 부품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다이얼 위에서 반짝이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무브먼트 안에 숨어 있어 평소에는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시계회사들은 왜 굳이 이런 곳에 보석을 넣을까요?

그리고 더 궁금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300년 전부터 사용하던 방식을 현대의 기계식 시계에서도 왜 여전히 사용하고 있을까요?

시계 속 루비는 장식이 아니다

기계식 무브먼트 안에서는 수많은 부품이 계속 움직입니다.

메인스프링에 저장된 힘이 여러 기어를 거쳐 전달되고, 이스케이프먼트와 밸런스가 움직이면서 시간을 일정하게 나눕니다.

이 과정에서 작은 기어의 축, 즉 피벗은 매우 좁은 면적에서 계속 회전합니다.

금속 축이 금속 플레이트와 직접 맞닿은 채 움직인다면 자연스럽게 마찰과 마모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움직임이 집중되는 곳에 단단하고 매끄러운 별도의 접촉면을 넣습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주얼입니다.

쉽게 말하면 무브먼트 안에 들어가는 아주 작은 베어링에 가깝습니다.

다만 모든 주얼이 단순한 회전축 베어링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케이프먼트의 팔렛이나 밸런스 주변처럼 힘을 전달하고 제어하는 부분에도 사용되고, 자동 와인딩이나 크로노그래프처럼 움직이는 구조가 추가되면서 주얼이 더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즉 붉은색 주얼은 시계를 화려하게 만들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시계가 계속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기계 부품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보석이었을까?

이 역할에는 꽤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합니다.

아주 작은 크기로 정밀하게 가공할 수 있어야 하고, 오랜 시간 반복해서 마찰이 생겨도 쉽게 닳지 않아야 합니다.

루비와 사파이어는 이런 조건에 잘 맞는 소재였습니다.

시계에 루비를 베어링으로 사용하는 시도는 이미 18세기 초부터 시작됐습니다.

1704년 니콜라 파티오 드 뒤이에와 드보프 형제는 루비에 구멍을 뚫어 시계의 피벗 베어링으로 사용하는 기술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습니다.

당시에도 목적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금속끼리 직접 맞닿으면서 발생하는 마찰과 마모를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무브먼트 안에 들어가는 주얼이 값비싼 천연 루비라는 뜻은 아닙니다.

현대 시계에는 대부분 합성 루비가 사용됩니다.

합성 루비는 천연 루비와 기본적으로 같은 결정 구조와 물리적 특성을 가지면서도, 균질한 품질로 대량 생산하고 정밀하게 가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무브먼트 안에 붉은색 루비가 30개 보인다고 해서 그만큼 시계의 보석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보석이라기보다 기능을 위해 선택된 소재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소재가 많은 지금도 왜 루비일까?

저는 오히려 이 부분이 더 흥미롭습니다.

기계식 시계는 지난 300년 동안 그대로 있었던 물건이 아닙니다.

가공 정밀도는 크게 높아졌고, 새로운 합금과 실리콘 같은 과거에는 없었던 소재도 무브먼트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얼 베어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단순히 '전통이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아직도 충분히 잘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기계식 시계의 발전은 과거의 기술을 전부 새로운 소재로 교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소재가 더 잘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면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고, 기존 방식이 여전히 충분히 역할을 한다면 굳이 바꾸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대 무브먼트 안에는 조금 이상한 조합이 공존합니다.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실리콘 부품 옆에, 수백 년 전부터 사용해온 루비 베어링이 함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기술이 한 무브먼트 안에서 동시에 작동하고 있는 셈입니다.

루비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기계식 시계가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니라, 굳이 바꿀 필요가 없었던 역할이 있다는 증거에 더 가깝습니다.

[이미지 출처 : 롤렉스 공식 홈페이지]

루비는 어디에 들어갈까?

가장 대표적인 곳은 기어의 회전축입니다.

기어 축이 주얼 안에서 회전하도록 만들어 마찰을 줄이고 축을 안정적으로 지지합니다.

하지만 기어 트레인에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케이프먼트와 밸런스 주변에도 주얼이 들어가며, 자동 무브먼트의 와인딩 시스템이나 크로노그래프처럼 추가적인 움직임이 있는 구조에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브먼트가 복잡해질수록 주얼의 숫자가 늘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생깁니다.

주얼이 많을수록 더 좋은 시계일까요?

[이미지 출처 : 예거 르쿨트르 공식 홈페이지]

36 Jewels가 30Jewels보다 좋은 것은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몇 개를 넣었느냐보다 그 무브먼트의 구조에서 어디에 필요한가입니다.

예를 들어 예거 르쿨트르 Calibre 925는 229개의 부품과 30개의 주얼을 사용합니다.

반면 크로노그래프와 캘린더 기능을 가진 Calibre 759는 367개의 부품과 36개의 주얼을 사용합니다.

Calibre 759의 주얼이 더 많은 것은 단순히 더 고급이기 때문이라기보다, 움직이는 부품과 기능이 더 많은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36 Jewels라는 숫자가 30 Jewels보다 무조건 더 정확하거나 더 잘 만들어진 시계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주얼 수는 무브먼트 구조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양이지, 시계의 등급을 매기는 점수는 아닙니다.

과거에는 높은 주얼 수 자체를 품질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기능과 관계없는 위치에 주얼을 추가하는 사례까지 있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그 주얼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 입니다.

오래돼서 남은 것이 아니라, 바꿀 이유가 없어서 남았다

17 Jewels, 21 Jewels, 31 Jewels.

이 숫자를 처음 보면 시계 안에 얼마나 많은 보석들이 들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얼은 장식도 아니고, 숫자가 높다고 시계의 가치가 그대로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다른 부분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기계식 시계에는 지난 수백년 동안 수많은 새로운 기술이 들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라진 구조도 있고, 새로운 소재로 바뀐 부품도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루비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오래된 기술이라서 남은 것이 아니라, 그 역할에서는 아직 바꿀 이유가 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계식 시계는 과거의 기술을 모두 버리면서 발전한 것이 아닙니다.

바꿀 이유가 있는 것은 바꾸고, 여전히 잘 작동하는 것은 남기면서 발전해왔습니다.

무브먼트 안의 작은 붉은 주얼은 그 사실을 가장 작게 보여주는 부품인지도 모릅니다.